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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없을 군생활과 2023년을 마무리하며

다시 없을 군생활과 2023년을 마무리하며

The Weirdest Year of my Life

2023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고, 잊지 못할 경험들로 가득찬 1년이었다. 작년 하반기를 포함해서, 근래의 1.5년은 인생에서 가장 이상한 날들을 보냈던 것 같다.

개개인의 능력과 개성, 책임, 자유보다는 조직 전체를 중요시하는 사회, 거대 기계의 부속으로서의 역할만을 요구받는 사회는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사회에서보다 책임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자유는 그보다 더더욱 가벼웠다.

그래서인지 이 닫힌 사회가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며 불만을 품기도 했고 염증을 느끼기도 했다. 여유가 없어지면 성격이 바뀐다는걸 처음으로 몸소 겪었던 것 같다. 계속해서 내 자신이 염세적이고 비관론에 물들어간다는 게 느껴졌다.

군에서 배운 것

다들 군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최대한 숨기라고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일들을 억지로 넘겨받아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될 것이라고.​

나도 어느정도 공감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간부들 사이에 퍼질 수록 더 많은 일이 내게 주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우리 부대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평범한 말단 야전 부대의 통신병 보직이더라도, 전문 지식을 요하는 병과여서 대체 인력이 없었다. 당장의 작은 문제를 외면하면 문제가 더욱 확산되어 더 큰 문제로 다시금 내게 돌아왔다.

결국 부대에서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일처리 계획을 세우고 우리 과의 모두에게 작업을 배분했다. 관습적인 과업 대응을 더 좋은 방법으로 수정시키기도 했다. 어느 순간 모두가 손 뗀 일을 내가 소화하고 있는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누군가는 해야했다.

​그렇게 세대 다른 간부들과 낯선 선임들, 아직 1인분을 해내지 못 하는 후임들 사이에서 열심히 구르다보니, 일을 하는 방법이나 눈치 보는 방법 같은 것들을 어느 순간 터득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의 휴가에서, 부모님을 따라 시골 댁의 김장을 도우러 갔다. 집안 어른들, 시골 댁 이웃 어른들 사이에서 김장 일을 하다 보니, 문득 부대에서의 일과 시간과 비슷한 향기를 느끼게 되었다.

​어째서 느끼지 못했던 걸까. 어른들 눈치를 보며 도움이 필요한 곳에 달려가고, 와중에 이미 내게 맡겨진 일을 해야하는 것이 마치 부대에서의 일과를 떠오르게 했다. 김장 작업 현장이 군 부대처럼 돌아갔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군 생활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이, 사실 어딜 가나 통용되는 “일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입대 전에 “번아웃을 이유로 일을 대충 하거나 일에서 도망가다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좋아하는 것, 취미로 하던 것을 일로 하면 일을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연구실 생활을 했었다. 그래서 취미 생활 하듯, 하기 싫은 일은 미뤄두기도 했다.

하지만 일은 일이고 업무는 업무였다. 결코 취미가 될 수 없었다.

통신과의 소대장님은 “나도 하기 싫지만 일이니까 해야지”, “그럼 소는 누가 지키나”를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취미 생활 하듯 일을 하던 나에게 묵직한 마디였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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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 말년에 KCTC, 육군과학화전투훈련을 받았다. 개인화기를 포함해서 각종 무기와 장비에 전자장비를 달고 실제 전면전 상황과 비슷하게 모의 전투를 하는 훈련이다.

이 훈련은 전쟁 상황을 가정하기 때문에 시설을 사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미리 준비한 장비와 물자만으로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15일 보름동안 씻지도 못한 채 산 속에 텐트를 치거나, 여의치 않으면 길바닥에서 누워 잤다. 실제 공방이 이루어진 각 3일, 6일 동안은 이조차도 못한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판단력이 눈에 띄게 흐려졌고, 문장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해 소통도 하지 못했다. 만약 실제로 전쟁터에 있었다면, 나는 그 상태로 보름 이상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전쟁터 한 가운데에서 보름을 버틴다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죽음은 공평하게 널리 퍼졌다. 한 시간 전에 만났던 아군 제대가 전멸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에이스 동기 여럿이 죽고, 오히려 가장 먼저 죽을 것 같던 다른 동기가 끝까지 살아남았다. 내 옆에 있던 대대장은 특수부대의 기습으로 죽었다. 마지막 날 동이 트던 새벽까지 살아있던 나 역시 차량 고장으로 발이 묶인 상대 부대와 교전하다 죽어버렸다.

이 모의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전쟁의 참혹함과 반전 사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된다.

운이 좋은 누군가는 살았고, 운이 나쁜 누군가는 죽었다.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참전 용사들에게는 그들의 공훈 뒤에 가려진 동료들의 죽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군 전역자들의 선제 타격이니, 북진 통일이니 하는 과격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전역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도 그들도 예비역이고 대한민국의 젊은 남성이다. 전쟁에서는 늦나 빠르나 동원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죽음으로 가는 무자비한 러시안 룰렛이 기다릴 뿐이다.

마무리

군 생활을 하면서 잘 마무리한 것도, 잘 마무리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이렇게 생활하며 얻어낸 것들이 단순히 겉보기에 성취가 있는 것 처럼 보이는건지, 내실도 열심히 쌓은 것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제 그렇게 갈망하던 군대 바깥으로 돌아가, 조금 더 열심히 조금 더 다양하게,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