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광주비엔날레에 다녀왔습니다.
비엔날레에 다녀왔습니다. 몇번이고 비엔날레 전시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서야 작품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번 비엔날레의 타이틀은 <판소리>입니다. 광주광역시가 서편제의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고, 전시물의 테마나 분위기를 보았을 때, 꽤 괜찮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
최근 수년 사이에 특히 두드러진 문제들, 전쟁, AI와 기계, 그리고 여전히 주요한 사건사고가 이어지는 소수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전반적인 테마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시는 전반적으로 디스토피아적이거나 아포칼립스 적인 작품이 있었고, 약한 수준에서 기괴하거나 아날로그 호러가 떠오르는 작품도 있습니다. 적어도 과반의 작품들이 긍정적이거나 희망적인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전시는 5개 테마 구성으로, 영상 전시가 꽤 있는 데다 전반적으로 볼륨이 꽤 크기 때문에, 테마 당 대략 한 시간씩 잡아서 둘러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았는데, 특히 그중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감정이나 경험, 혹은 조금 메모할 작품이 있습니다.
<울고 있는 삼촌의 방>
source: 뉴스핌
[서울=뉴스핌] 광주비엔날레 1전시실에 설치된 최하늘(33) 작가의 작업 ‘우는 삼촌의 방’. 2024.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4.09.12 [email protected]
제목에서 알 수 있는 “삼촌”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최소한 삼촌의 상태가 정상적이고 긍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삼촌이 마주한 것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거나 한 개인이 오롯이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무채색이고 전반적으로 하얀, 말끔하게 절단된 뼈, 살점, 팔다리, 혈관과 힘줄들이 다발로 묶인 채 즐비합니다. 제목 없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고,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겠구나 싶은 우려를 불러일으킵니다.
함께 있던 친구는 옆에서 마치 게임 <엘든링> 속 장면이 튀어나온 것 같다고 평했습니다. 전반적으로 같은 감상입니다.
<수궁가>
분리된 방에 두 개의 프로젝터가 공통된 하나의 아크릴판에 각각 다른 영상을 재생합니다.
한쪽은 주택가에 자리 잡은, 운동장이 넓은 학교처럼 보였습니다. 거대한 엽기 토끼 풍선을 비스듬한 각도로 부분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나무와 풀 같은 것들을 계속해서 스쳐 지나가게 보여주었습니다. 두 영상 다 조금 흐리면서도 뚝뚝 끊겨서 지켜보기만 해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점점 피곤해지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하면서 윤동주의 <서시>를 낭독하는 방송이 재생되었습니다. 어딘가 시설에서 방송한 것을 녹음한 것처럼 보였고, 맥락상 화면에 나타난 시설에서 음성 방송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리의 음질 자체가 상당히 좋지 않았고, 중간중간 끊긴 데다, 마지막에는 아예 글리치되어 꽤나 기괴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날로그 호러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영상이 전개될 수록 학교보다는 무언가 교도소를 촬영한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확인한 것은 아니나, 작품은 용산 미군 기지에서 촬영했다고 합니다.
<신병 훈련시키기>
한 테마가 마무리되고 다음 전시관으로 넘어가면서 마주한 음향 작품입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경사로에서 전시되고 있었고, 경사로가 주는 다소의 부담이 “훈련”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접한 직후에는 제목 때문인지 논산에서의 기억이 조금 떠올랐습니다.
이윽고 작품에서 나오는 남성의 신음이나 효과음들에서 리듬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작품이 이야기하려는 것이 신병이 교육대에서 마주하는 고난이나 역경을 조명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와닿았습니다.
특히 남성의 신음은 들을수록 고난에서 나오는 흐느낌보다는 무언가 모호하고 미묘한 느낌이 조금 더 있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해병문학”이 조금 더 떠오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이 작품은 최소한 군대 안에서 부속화되는 신병을 조명한 것이 아니고,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군대라는 조직 자체를 희화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주제나 분위기가 군대라는 존재를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므로,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방주> <하니와>
두 작품은 작품의 내용이 인상적이라기보다, 외견적인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배경의 쭉 뻗어있는 빈 공간에 사람이나 물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꿈속인 것 같기도 하고 리미널 스페이스를 떠오르게 하기도 합니다. 혹은 3D 인디게임, 구체적으로는 <휴먼 폴 플랫>이나 <포가튼 웨이즈>가 떠오릅니다.
두 작품이 조명하고 있는 대상이나 내용이 아닌데도, 주변적인 특징에 더 신경쓰이게 되는 이유가 이러한 경험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두 작품을 모티브로 3D 게임 씬을 구현해 보고 싶습니다.
<시스템의 공허> <아래>
source: 뉴스핌
[광주=뉴스핌] 제15회 광주비엔날레 2전시실에 설치된 아르마니아계 리투아니아 작가인 안드리우스 아루티우니안(33)의 ‘아래’, 2024. 역청(석유 추출물), 금속, 진동 코일, 가변 크기.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4.09.09 [email protected]
<시스템의 공허>와 <아래>는 프로그래밍된 시스템이나 인공지능과 같은 것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위험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시스템의 공허>는 단지 어두운 공간에 모래 언덕, 그리고 검은 원통 여럿이 배치되었을 뿐입니다. 동시에 뒷배경에는 마치 시스템에 인증을 시도하듯, 특정한 형식의 문자열과 승인/거부 여부가 조용히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부정하게 묘사한 것이 아님에도 약간의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이질적이었습니다. 게임 <포탈> 시리즈의 애퍼처 사이언스가 떠오르기도 하고,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떠오르기도, 여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몇몇 인디게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래>는 <시스템의 공허>와 달리 직접적으로 위험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선풍기 비슷하게 보이는 물체들로부터 검은 전선 더미가 흘러나와 서로 겹치고 엉키는 모습이, 마치 심연을 지켜보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함께 재생되는 저주파의 우웅거리는 소리도 조금 위협적이었습니다. 전선이라고 인식해서인지 무언가 시스템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두 작품은 프로그램으로부터 촉발되는 위기들, “최후의 날 기계”나 AI의 잘못된 판단, 기계 반란 같은 것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최근에 Claude 3.5 Sonnet이 의식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도 떠오릅니다.
특히 이 작품들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프로그램의 실패나 오작동은 흔하게 있는 일이고 대개는 치명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고치면 됩니다. 하지만 식별되지 않은,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문제가 갑자기 큰 피해를 수반하며 벌어질 수 있습니다. 최근 인공지능 분야에서 특히나 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미래에 관련한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전공자로서, 일종의 작은 책임을 부여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원자가>
source: 뉴스핌
[광주=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 제 3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영국 작가 해리슨 피어스(38)의 ‘원자가’ 2024. 모듈형 키네틱 조각 및 사운드 설치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강, 실리콘, 나일론, 공압 자동화 시스템, 사운드 시스템), 가변 설치, 10분.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진=광주비엔날레] 2024.09.09 [email protected]
이 작품은 일반인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전에 DEAP 논문을 리뷰하면서 valence의 의미를 조금 더 깊게 알아보아서 작품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작품의 원제인 valence는 쾌락조로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비밀 실험실과도 같아 보이는 방에 뇌 모양의 풍선이 수액 줄 더미에 연결되어 선반 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풍선이 방에 여러 개 놓여있어, 통 속의 뇌가 떠오르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PSYCHO-PASS>의 “시빌라 시스템”이 연상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풍선 자체가 뇌보다는 돔 형태에 가깝기 때문에 기괴하거나 혐오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작품이 작동하면 임의로 풍선들이 퉁 튀어서, 마치 쾌락을 수용하는 두뇌를 떠오르게 합니다. 작품의 번역이 <원자가>가 아니라 쾌락조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 유튜브 쇼츠, 틱톡의 숏 폼 영상에서 비롯되는 팝콘 브레인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현대인의 쾌락 수용을 다소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 같았습니다.
다른 방향으로는, 영화 <매트릭스>같이 언젠가 기계에 신체의 자유를 빼앗기고 두뇌에 들어오는 반응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25피트> <서안지구> <개> <호저>
중동 지역의 대표적인 분쟁 지역, 서안지구에서 감시카메라로 촬영된 장면들입니다. 감시카메라 특유의 회색조와 실체만 겨우 알 수 있는 수준의 해상도가 더욱이 인상적입니다. 현장에서 정말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느낌이 극대화되기도 하고, 대개 전쟁 다큐멘터리나 전쟁 영화 등지에서 보았던 장면들과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특히 다른 작품과 달리 영상 작품인 <25피트>는 철조망을 넘으려는 개의 모습을 계속해서 추적해서 보여주는 것이 기억에 강하게 남습니다. 철조망에 접근하는 물체가 동물인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화하는 듯한 흐린 음성 통신이 함께 재생되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분쟁 지역의 많은 철조망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므로, 작품에서 개가 처음 철조망을 넘으려 시도할 때는 정말 우려스럽게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철조망에 올라 그저 멈추었을 때는 감전사했다는 인상을 받으며 강한 무력감도 함께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철조망에서 내려오고 다시 한번 철조망을 넘으려고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철조망이 생명을 죽이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여전히 철조망이 두 구역의 분리라는 본연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씁쓸함? 인상? 묘한 감정을 섞어 느꼈습니다.
<벽의 해체 (앨범 2)>
자연이 폭발로 파괴되는 모습을 표현하는 영상 작품입니다. 중동의 전쟁터를 연상케 하는 장면에서 폭발이 발생한 후 외곽선만 남기고 화면이 암전됩니다. 이어서 폭발의 열풍이 계속해서 퍼져나가다, 영상이 충분히 전개되면 다른 환경으로 전환하고 반복합니다.
전시 장소에는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도록 구조물이 놓여있습니다. 실제로 영상이 꽤 길기도 하고, 단순히 멍때리면서 지켜보기에도 꽤 괜찮은 작품입니다.
파괴되는 환경들이 언덕이나 산이고, 영상 자체도 거대한 LED 스크린에서 재생되고 있어 벽이 해체되고 파괴된다는 인상을 직접적으로 받았습니다. 폭발 직후부터 영상이 굉장히 느리게 흘러가서 파괴되는 과정을 강조하는 듯 하기도 합니다.
암전된 배경, 느리게 퍼져가는 열풍, 조금씩 불타기 시작하는 자연환경이 합쳐져 어느 순간 파괴되는 자연환경이 아니라 마치 레이더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아이러니를 느끼기도 합니다.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
source: Unmake Lab
생태 환경과 기술 문명을 대조하며 기술 문명의 발전이 생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나 논의들을 계속해서 풀어나가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 작품입니다.
멸종위기종의 소멸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상태가 데이터로 남아있다.
(네스호의 괴물 이미지와 함께) 이러한 데이터 자체가 없는, 식별되지 않는 종도 있다.
전시 마감 직전에 보아서 10분 남짓의 시간 동안밖에 관람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다른 이야기들을 전개해서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제한된 시간 안에 전체 범위로 바라볼 수는 없었습니다.
‘잘못 박제된 호랑이의 인기와 이 박제의 복제품 전시, 원본의 도난 후에도 식지 않는 인기’, ‘멸종 위기종이 된 생물들과 사람들에게 식별된 멸종, 기술 문명의 발전으로 멸종 위기종 대신 새롭게 발견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만 관람했는데, 작품 전체 주제가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생각할 것들을 많이 던져주었습니다.
이제는 익숙한 “새 시도”들
이번 비엔날레도 비교적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특히 AR 기술이 기억에 남는데, 아쉬운 수준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유니티와 AR 기술을 이용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300MB가 넘는 용량의 앱을 스토어에서 뷰어를 직접 검색해서 다운로드받아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많은 기기에서는 다운로드받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신제품에 속하는 갤럭시 Z 플립 5에서도 다운로드받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갤럭시 Z 플립 5는 ARCore 지원 기종입니다.
앱을 설치한 후에도 전시를 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메뉴를 더 거쳐야 했고, 전시 트리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이폰 12 프로 기준에서 간단한 모델만 있는데도 프레임이 떨어지거나, 씬(.unity
파일) 사이의 전환 처리를 따로 걸지 않아 씬을 불러오는데 뚝 끊기기도 했습니다.
AR 공간의 시작점에서 휴대폰을 계속 전진시켜야만 전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전시를 실행하는 트리거가 벽에 프린트되어서 휴대폰을 제대로 전진시킬 수 없기도 했습니다. 벽에 완전히 붙어도 여전히 더 전진해야만 전시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전시를 잘 경험할 수 있는 최소 여유 공간이라도 표시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비엔날레 전반에 도입된 AR 도슨트도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앱을 설치해야만 하는 전시와 달리 웹상에서 구현되어 어느 기기에서든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AR 전시보다도 많은 기기에서 프리징이 생기고, 수월하게 조작하기 어려웠습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잘 작동하더라도 여전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도슨트의 역할은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활용할 수 있는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AR 도슨트는 이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AR 기술을 제거하더라도 같은 역할은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많은 전시에서, 그리고 비엔날레에서도 도슨트가 정보를 음성, 대화를 통해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사실상 도슨트의 역할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도슨트의 실체적 특징을 구현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도슨트는 전시를 함께하며 관람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게 설명해 주므로 무언가 불편한 것이나 나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이 없습니다. 프로그램화된 도슨트는 아닙니다. 불편한 행동 몇 가지를 계속해서 취해야 합니다. 도슨트에게 가장 적절한 정보 전달 수단은 음성이지만, 프로그램의 가장 적절한 정보 전달 수단은 음성이 아닐 수 있습니다.
힘들어요
작품들이 직관적이기보다 함축적이고, 오랫동안 고민해보아야해서 3관 전시부터는 지치고 피곤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작품이 상징과 은유, 함의로 가득했습니다. 테마마다 한 시간씩 관람한 것도 작품을 오랫동안 곱씹어보아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마감 시간이 임박해서 정확히 50%.. 3관 절반부터는 제대로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신적으로 굉장히 지쳐서, 무언가 중요한 시험을 집중해서 오랫동안 응시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일 재입장이 가능하다고도 하니, 개장 시간에 입장해서 3관까지 관람한 후, 잠시 쉰 뒤 나머지 4, 5관을 관람해서 마감 시간에 가깝게 관람을 마무리하면 꽤 만족스러운 관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