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실망에 관하여
아래는 <미디어로보는일본문학과감성> 교과 수업 과제로 제출한 독서감상문입니다.
기대와 실망에 관하여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고
간만에 소설을 읽겠구나. 소설은 좋아하는 편이었으므로, 이 과제를 꽤 환영했습니다. 비록 소설을 읽은지 꽤 오래되었고, 최근에는 읽더라도 정보나 자료 전달이 위주가 되는 소위 “비문학”을 더 많이 읽었음에도 말입니다. 책을 읽더라도 비문학을 고집해서 읽는 이유도, 이전에 문학 작품을 지나치게 많이 읽은 것을 의식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외로 일본 문학과는 가깝지 못했습니다. 『겐지모노가타리』나 『인간실격』 같이 널리 알려진 작품들은 당연히 이름은 알고 있으나, 독서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하나 쯤은 읽어두고 싶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가 살았던 당대에 팽배했던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맞선, 보기 드문 유형의 인물임과 동시에,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절망같은 것을 절실하게 겪었던 인물입니다. 나라의 지원을 받아 간 영국 런던으로의 유학 중에는 무엇을 위해 책을 읽어야하는지 모르겠다며 고민하거나 신경 쇠약에 걸리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사회 문제를 고민하는 철학가라는 인상을 갖게 되기도 하고, 주요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저항가 같은 인상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인물을 알아볼수록, 입시를 준비하며 접했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구보 씨가 이런 인물이었을까 싶었습니다.
이윽고 그의 생애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를 통해 나쓰메 소세키에게 어딘가 허무적인 냄새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인상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마음』을 읽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마음』 속에서
주인공 “나”는 놀러간 바닷가에서 “선생님”을 만납니다. 기묘한 노령의 남자와의 이어지는 교류와 사유는 “나”가 선생님에게 빠지게 하는 데 충분했습니다. 선생님은 무언가 따르고 배울 수 있는 철학관과 윤리관이 있었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집에 들락날락하며 선생님과의 대화를 생활의 낙으로 삼으며 살아갑니다.
나는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종종 드러나는 선생님의 어두운 과거의 존재를 발견합니다. 정확히는 선생님이 자신이 존경할 사람이 못 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되는 어떤 사건이나, 선생님은 도저히 이것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선생님이 직업도 없이 어째서 은둔 생활을 하는지, 계속해서 어떤 인물의 묘에 계속해서 참배를 다녀오는지 궁금해합니다.
선생님이 품은 선생님의 과거는, “나”가 병세가 악화되어 고향으로 떠난 사이에 선생님이 자살하며 드러납니다. 나의 고향으로 보내진 편지에서 나는 선생님의 유서와도 같은 고백 편지를 받게 됩니다. 고백 편지에는 지금의 선생님이 은둔 생활을 하게 된 일련의 서사가 적혀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 시기 부모님을 잃고 숙부의 지원으로 도쿄의 고등학교를 다닙니다. 이윽고 충분히 시간이 지나며 숙부는 자신의 딸과 선생님이 결혼할 것을 권유하고, 선생님은 이를 거절합니다. 점점 숙부를 향한 시선이 변하게 되면서 자신이 모르던 것들, 외면하던 것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재산 문제에 있어서 다툼을 벌인 선생님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고향을 영영 떠납니다.
도쿄의 하숙집에서 지내던 선생님은, 더 이상 고향의 지원을 받지 못해 갈 곳이 없어진 자신의 친구 K를 자신의 하숙집으로 데려옵니다. 시간이 지나며 선생님과 K는 모두 하숙집의 딸, 아가씨를 좋아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아가씨와 함께 있는 K의 모습을 질투하거나 종종 K를 견제하는 듯한 행동을 합니다.
이윽고 K가 선생님에게 아가씨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고, 선생님은 K의 약점을 이용해 아가씨를 향한 K의 마음을 막아섭니다. 이어서 하숙집의 부인에게서 딸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냅니다. 선생님에게 마음이 막히고 몰려있던 K는, 선생님과 아가씨의 결혼 약속 소식을 듣고 얼마 가지 않아 자살하게 됩니다.
K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선생님은 그 뒤 평생을 K에게 속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가씨와 결혼한 후에도 자신의 아내에게 이러한 배경을 제대로 밝히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점차 아내조차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아내조차 점차 불신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 전반에 있어 불신이 팽배하게 되어 폐쇄적인 삶을 살아간 것이었습니다.
기대와 실망에 관하여
주인공은 작품 내내 선생님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내는 듯 했습니다. 그 정도가 너무 강해서 어쩌면 종교적인 믿음에 가까워보이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이 이렇게 광적이 믿음을 보이는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제가 작품을 읽어내려가며 그려낸 선생님의 이미지 역시 주인공이 선생님에게 갖는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선생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니, 선생님은 어떤 불행한 사건을 계기로 자택에 은거하는, 무언가 대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선생님의 말투나 단어 하나하나가 고상한데다 어딘가 부드러운 감이 있어서, 실제로 지식인에 가깝게 보였습니다. 일을 않는데도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잘 사는 것 같았고, 동시에 사치를 부리지 않고 오히려 검소함에 가까운 절제된 생활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인물의 인물됨을 보려면 주변 인물을 보라는 말이 있듯, 우아하고 고상한 대화를 이어가는 선생님의 아내를 접하면서 이러한 생각은 굳어졌습니다. 선생님 내외는 선생님의 호칭을 달기에 충분한, 주인공을 이끌만한 부드럽고 올곧은 인물됨의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유서에 가까운 편지는 꽤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편지 속 고백은 점차 선생님에 대한 베일이나 환상을 벗겨내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 결정적이고 중대한 사건이 지금의 철학적인 선생님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사그라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선생님이 인간을 불신하고 은둔하는 삶을 살게 한 건 돈 문제니 사랑 싸움이니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속세적이며 일반적인 문제들이었습니다. 선생님에게 했던 기대는 모두 무너졌습니다.
사실 K가 등장하고 아가씨를 두고 미묘한 상황이 이어짐에도, 선생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접하는 부분은 K와의 갈등을 야기하는 단편적인 에피소드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매달 찾는 친구의 무덤이 K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 덜 현실적이고, 철학적이거나 고차원적인 문제가, 선생님의 인생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선생님의 “나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는 것은 선생님 내면의 기준치나 목표치가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겸손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은 진실만을 이야기했고, 선생님의 이미지나 생활을 멋대로 기대한 것은 소설속의 “나”와 그걸 읽고 있는 저일 뿐입니다.
선생님의 고백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면서 든 생각은 “아 뭐야 별거 아닌 사람인데?”하는 실망감이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하거나 은거한 사람이 아니었고, 어쩌면 처음부터 존경할만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고민 속에 빠져 살 것 같은 사람이라는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어저면 나쓰메 소세키는 이것을 유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은 항상 사실만을 말했습니다.
작중에서 선생님에 대한 베일이 벗겨지면서 선생님도 결국에 희노애락과 고통, 철학적인 것보다는 조금은 현실적인 감정들을 우선한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선망하거나 바라보는 누군가도 결국에는 같은 인간이다.. 널리 쓰이는 소재이고, 자명한 문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걸 잘 체감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이나 되고 싶은 사람, 존경하는 사람은 위인이나 성인군자처럼 보이고, 약점이나 단점은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기대를 상대에게 대입하고 멋대로 실망하기도 합니다. 혹은 대상 역시도 같은 인간이라는 것에 의외의 안심을 갖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자라왔습니다. 진로를 컴퓨터로 잡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몇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제게 있어서 작품의 “선생님”과도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단한 위인도 아니고, 조금 널리 알려진 일반인이거나 그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기대를 투영해서 이들을 바라보고 따라잡으려고 했습니다. 사실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좇고 따라가면서 저 역시 배우고 발전한 것이 많았습니다. 시야가 넓어지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어린 시절부터 이어졌던 롤 모델이 제 프로그래밍 작업물을 보고 제 개발자 계정을 팔로우했을 때는 정말 날아갈 것 처럼 기뻤던 기억이 있기도 합니다.
저는 여전히 “선생님”들에게 일종의 기대를 투영하고, 따라잡지 못할 먼 곳에 있는 사람의 방향을 따라가는 것에 의의를 두고 그저 좇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서야 알게된 사실인데, 저 역시 그러한 선생님 중 한 명이 되고 있었습니다. 제 행동이나 발자취가 누군가의 방향타가 되고 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절 바라보는데 사용하는 기대에 맞춰서 행동하게 되거나, 점차 부담이 늘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도 평범한 사람이므로 더욱이 그러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결국에는 인간, 고통을 느끼고 잘못을 저지르거나, 실수를 바로잡고 속죄를 하기도 하는 그저 인간일 뿐입니다.
이제는 본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찍히면 죽는 사회: 모두가 유재석이 되고 싶은 사회>라는 유튜브 영상이 문득 떠오릅니다. 영상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기대라는 렌즈에 더 자세하고 복잡한 내용물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기대에서 벗어나면 매장을 당하게 됩니다. 점점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보고합니다. 마치 법과 규칙의 사각지대에 대중의 제재가 자리잡은 듯한 느낌입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전 항상 존댓말을 사용하고, 벽을 만들고 상대를 대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 만난 사람들과는 격의 없이 지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경계가 풀리는 건 대학 이전의 친구들이거나, 오랫동안 두고 보면서 확실하게 검증된 상대뿐이었습니다. 절대로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 자신에게 깨끗함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느끼건대, 이러한 제 자신에 피로감을 느끼는 중입니다.
『마음』을 읽으며, 고상했던 선생님의 현실적이고 속세적인 인간 고뇌를 지켜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 실수할 수 있는, 항상 고뇌와 번뇌 속에서 헤매이는 인간임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