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천천히 세차게
아주 천천히 세찬 비가 내렸던 것이다.
It rained, with powerful slowness.Jorge Luis Borges, <Aleph> (1949)
24년 한 해 나름 무언가 달성한 것들은 있었지만, 군 생활을 계기로 다짐했던 것들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
입대 전 바꾸지 못해 후회했던 것들, 철조망 안에서 바깥 세상을 바라보며 부러워했던 것들, 바꿔내고야 말겠다고 했던 것들,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바꾸지 못했고 이루지 못했다.
그저 군 생활에서 남는 시간에 했던 일들의 연장선만 그려내고 있었다.
변화도 없고, 이룬 것도 없는데, 군대 동기들이 모두 전역하는 것도 모자라 후임까지도 전역하기 시작하는 것이 야속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는 듯 했지만, 동시에 아주 세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굉장히 못마땅한 사실이다. 마치 혼자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느낌은 만성적인 우울감, 불쾌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래고 실패와 시행 착오가 이어지면서 정서 문제가 심화되었다.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던 자존감은 갈 곳을 잃어버렸다. 무력이 나를 지배했고 기대는 나를 가지고 놀았다. 여전히 <이변은 없었다>.
분류된 저위험군
이러한 감정 상태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그리고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심리 검사를 수 차례 받았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상담에 불려나간 일도 꽤 되었다.
다만 이러한 심리 프로그램의 목적은 고위험군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일상생활이 어려운 수준이 아니고, 고위험군도 아닌 내게는 효과적일 수 없었다.
나는 상담에 불려갈 때마다, 내가 지금의 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고, 왜 이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어째서 감정 기복이 심한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설명하면 할수록, 상담사는 눈 앞의 내담자에게 안도감을 느끼는 듯 했다.
결국 심리 상담은 모두 일회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시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홀로 견뎌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소외감
그 누구보다 사람들과의 깊은 관계를 갈망했지만, 그 누구보다 넓고 얇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집단 속에 박종현이 있었지만, 그 어떤 집단에서도 박종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느 곳에서든, 그곳의 사람들이 나를 함께하는 친구라고 생각하더라도, 심지어는 회장으로 있었던 동아리에서마저, 나는 외부인이었다.
여름 즈음에 한 동아리 후배가 왜 모두에게 높임말을 쓰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워서 막연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 대답을 납득해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어디서나 소외감을 느꼈던 것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동시에 정말 이중적이고 모순적이게도, 모르는 어떤 장소에서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나서, 혼자 소외되는 것이 정말로 싫었다.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도 너는 외부인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과로와 함께 망가지다
이렇게 생겨난 부정적인 감정들을 제어하는 데 선택한 대책은 비는 시간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일을 끌어왔다.
정신적인 문제를 신체적으로 틀어막은 셈이다. 당연하지만 적절한 해결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건강도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심리 상담 중에는 일을 조금 포기하고 줄이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작한 일은 어떻게든 끝을 보겠다며 당시에도 몇 가지 일들을 억지로 끌고 갔다. 당연히 만족스러운 결과는 낼 수 없었다. 오히려 손을 댈 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도 했다.
2학기에 들어서 온몸이 경고를 보내는데도, 일평균 서너 시간만을 자고, 하루에도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를 몇 잔씩 마시고, 심장이 무리하는 느낌을 온 몸으로 느껴냈다.
달성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저 온 몸을 불사르기만 하고 있었다.
앞뒤로 돌아보니
올해의 정신적인 부담과 피로는 군 복무 시기보다 더 심각하고 복잡한 것 같다.
그 때는 문제의 원인이 명확했다. 남은 복무기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간이 너무 느리다고 불평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리는 상급자를 욕할 수 있었다. 정신적인 부담을 일시적으로라도 완화할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든 문제는 내 자신에게 있다. 원인은 흐릿하고 다양했다. 너무 입체적이었다.
연초에 그런 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도 결국에는 대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학부생이다.
다른 보통의 대학생처럼 대학 생활을 살아라.
지금 하려는 것은 보통의 대학생이 하는 일이 아니다.
너를 힘들게 할 것이다.
그 때 어떠한 이유가 있었든, 그 조언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건 지금의 나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로 이 지경이 된 것도 지금의 나다.
..하지만 그때 그 조언을 따랐으면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