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 사가에서 만난 모두에
사가에서 만난 모두에
한국어는 여기: 「(ko) 사가에서 만난 모두에」
日本語の方はこちら: 「(ja) 佐賀で出会った皆へ」
for English: 「(en) for All in Saga I met」
다른 한국인 유학생과 함께 구마모토를 여행하다 원래의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사가로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문득, 곧 한국에 돌아가야할 날이 머지 않았구나 하는걸 실감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교환학생 파견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해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오면서 감사하게도 한국의 회사인 미래에셋증권으로부터 큰 돈을 지원받았습니다. 받은 금액에는 못 미치지겠지만, 그에 응하는 가치의 무언가를 내어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간의 일기와 메모 덩어리, 휘갈겨쓴 노트들을 모으고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문장들은 여기서 보고서로서 담기에는 조금 개인적일지도 모르는, 미완의 문장들을 그대로 지우기 아까워 늘어놓은 것입니다.
이번 교환학생 기간에 만난 것들에 달아놓고 싶은 말을 그저 풀어내보려고 합니다. 심심풀이로 슥슥 훑어볼만한,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1인 연극의 감독 코멘트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시작
‘어릴 때 여행에 데리고 가봤자 다 크면 기억도 못하니까 아깝다’고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서 말해둡니다만,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그 이유로 기억이란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SNS에서 잊을 때 쯤 다시금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먼 옛날의 기억은 잊어버리거나 먼 미래에는 현재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가까운 옛날의 기억이 계속해서 가까운 미래로 이어지고, 그것이 반복해서 계속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제가 사가에서 생활하게 된 것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1년 전, 교환학생을 보내준 학교와 사가에서 생활하는데 큰 도움을 준 장학재단에는, 일본의 게임회사를 동경하고 있어 기어코 그들 중 한명이 되고 싶다, 그래서 우선 일본에서 생활해보고싶다고 했습니다. 그 진실성은 <니어 오토마타>와 <엘든링>을 플레이하면서 느꼈던 감정들로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년 전, 대한민국 파주시의 북한과의 접경지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기어코 버려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곳에서의 생활에는 이골이 났습니다. 만약 당시 그리고 지금의 세계 속 다른 나라처럼 우리나라가 변고를 맞는다면, 그래서 다시 이 장소로 돌아와야만 한다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일본으로의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하고 일본어를 닥치는대로 공부했습니다.
“나 일본으로 워홀갈까 싶어”
5년 전, 갓 성인이 되자마자 들어간 게임개발동아리. 그곳에서 아마 제게 꽤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제게 했던 말입니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워킹 홀리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해외에 나가서 살아보겠다는 생각 일체를 할 수 없었습니다.
10년, 어쩌면 15년 전, 상당히 어릴 때부터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라이트노벨을 읽지 않았다면, 일본에 이렇게 엮이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임개발동아리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릴적의 저는 한국 아이들보다는 일본 아이들보다 공유하는 문화적 코드와 공감대가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의 트와이스와 엑소의 신곡에 열광하고, <응답하라 1988>에 열광할 때, 저는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소드 아트 온라인>에 지나치게 몰입해 이런 저런 낯부끄러운 행동들과 발언들을 서슴치 않고 했습니다.
# 역시 “종현”은 발음하기 어려운가봐
절 소개할 때면, 항상 성씨인 “파쿠(パク; 성씨인 ‘박’을 의미)“로 불러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럴 때면 종종 “한국인은 다 박씨 성씨 아니냐” 라던가, “정 없는 것 같으니 이름으로 부르겠다”라던가, 아무튼 이름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하지만 가타카나 발음 표기를 보여주어도 발음이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짠 것처럼 “죤?횬…“이라고 말하는 듯한, 무언가 악센트가 들어가는 것이 미묘했습니다. 아마 여느 만화의 한 장면이라면 말풍선에 정말로 “죤?횬…“이라고 적혀있을 것 같았았습니다.
하지만 다행인건 이번 교환학생 한국인 중에, 박씨 성씨의 한국인은 단 둘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일본인도 부르기 쉬운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쿠상(PARK씨) 명칭은 제가 가져가고, 그 친구는 이름으로 불리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 사가에 남는 사람들, 사가를 떠나는 사람들, 사가로 모이는 사람들
대도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쓸 줄 아니,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다면 소도시로 가보라는 조언을 받고, 사가행을 택했습니다. 사가는 마치, “일본에서 제일 유명하지 않기로 유명한 곳” 같았습니다.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 어느 날은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일본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군 시절 동기를 찾아 도쿄를 방문했습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어떤지, 아르바이트는 할만했는지, 외롭거나 하지는 않은지 듣고 싶었습니다.
사가라는 지역을 들어본 적 있냐는 제 물음에 친구는, 잘 모르겠다를 연신 반복하다가 사가의 한자 표기를 보고는, 자신의 알바처에서 사가산 양파가 들어오는 것 같다는 짧은 감상만 돌려주었습니다.
사가로 놀러온 한국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후쿠오카의 한 이자카야에서 주인장과의 대화하는 중에 사가에 간다는 친구의 말에 왜 그곳을 가는 거냐며 주인장이 의아해했다고도 합니다.
사가는 쇠퇴하고 있는 전형적인 소도시로 보였습니다. 사가에 머물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사람 많은 곳을 찾아 나선 일요일 저녁, 사가역 거리는 사람은 커녕 정적만이 감돌았습니다. 분명 사가역은 사가에서 가장 번화한 곳일텐데도.
이 짧은 기간에 오랜 역사를 유지한 것 처럼 보이는 꽤 다양한 점포들이 장사를 접은 것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지역에서 50년은 자리를 지켜온 슈퍼마켓이 폐업을 위해 간판대를 전부 비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현지 지역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섭섭했습니다.
실제로 진학해도 후쿠이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는 녀석도 꽤 많다. 그냥 후쿠이가 좋아서 그런 경우도 있고, 오래 살아서 익숙한 곳을 떠나 혼자서 사는 게 두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 후쿠이에서 태어나, 후쿠이에서 자라고, 후쿠이에서 가족을 만들어 후쿠이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소설 <치토세 군은 라무네 병 속에 3, 33-34>
사가와 비슷한 지방 소도시인 후쿠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누군가는 설령 시골이더라도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독백이 있었습니다. 문득 모두가 일말의 예외 없이 수도권을 향해 떠나는 선배들, 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일본에서는 실제로는 어떨까, 저건 단지 소설에 불과할까. 아니면 실제로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런 인생 싫어요! 이런 시골 싫어요! 다음 생엔 도쿄의 꽃미남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제가 만난 이들은 대개 진취적이어서, 큰 도시로 떠나거나, 심지어는 해외로 나가보기를 노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교환학생 입장에서 학교에서 만나는 현지 학생들은 외국인과 친해지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사용하고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이므로, 대개 진취적이거나 모험적이고,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기어이 뛰어드는 것이 이상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이들은 도쿄, 못해도 규슈 제 1의 도시인 후쿠오카로는 가겠다는 눈치였습니다.
하루는 오이타현의 히타시를 여행하면서 현지 마을의 역사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역사관에서 여행객 앙케이트를 작성하면서 현장 직원에게 사가대학 소속이라고 밝혔더니, 마침 자신의 아이가 사가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며 반가워했습니다.
사가에서는 한국의 광주에서보다 어린 아이들, 학생들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학원이다, 태권도 학원이다, 온갖 학원을 순회하며 어린 세대를 쉽게 보기 어려운 한국이 특이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친구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 텐푸라와 라멘과 디저트를 먹고도 살아남기
일본은 세계에서도 손꼽힐정도로 비만율이 낮은 국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도저히 이것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감히 텐푸라, 라멘, 빵과 디저트를 선두에 두는 식문화를 두고 어찌 비만율이 낮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 오늘의 점심(650엔); 멤버 Z: 일본은 전국민이 다이어트를 하나요?
하지만 이윽고, 이들의 적은 식사량과 자전거의 사용에서 구체적인 진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밖에서 밥을 먹게 되면 1인분으로는 양이 부족해 오오모리(양 많이)나 두 배 옵션을 선택하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배고프게 되었습니다. 특히 학식에서의 1인분은 한창 때의 젊은 청년들이 만족할 수 있는 양이 절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재밌는 것은, 대개는 그렇게 먹으면 다들 만족한 듯이 자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사가에서 생활하는 모두는 아마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가에서는 자전거 없이는 생활이 꽤 힘들었습니다. 사가에서의 생활을 정리할 때 즈음 기록을 살펴보니 월에 190km 내외를 자전거를 이용했다는 듯 했습니다.
대개는 애플워치의 운동 자동 인식 기능이 기록한 내용이니까, 실제로는 월에 250km는 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렴 그렇게 타면 있던 살이 문제가 아니라, 우선 하체 운동은 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저는 평소의 트레이닝 루틴을 바꾸었습니다. 원래 하던대로 하체 운동을 하면 다음 날에 못 걷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부터 큰 난관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기어코 자전거와 함께 도보를 기어갈 생각이 아니라면, 하체 운동을 조금 약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철인3종을 우습게 봤다
“오 그럼 교환학생 끝나고 나서는 철인3종이나 해볼까?”
사가 생활에 자전거가 필수라는 말을 듣고는 교환학생을 준비하면서 진심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그야 마라톤은 이미 할 줄 알지, 자전거는 질리도록 탈 것 같고. 수영만 준비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침 집 앞에는 큰 수영장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사가에서의 조깅 대회. 저는 20km를 달렸습니다. 문제는 대회 현장까지 자전거로 이동을 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시간을 충분히 들여, 느긋히 천천히 회장까지 이동했음에도, 결국에는 개인 하프 마라톤 기록의 1.7배 정도가 더 늦어진 2시간 30분 즈음 만에 완주하게 되었습니다.
첫 하프 마라톤 때도 이렇게나 힘들지는 않았는데. 다리가 근육이 아니라 마치 무쇠가 된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계속 경련해대는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철인3종을 진지하게 준비하겠다고 관련한 정보를 찾아보면 “근전환”이라는 용어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근전환이라는 것이, 각각의 종목에 맞게 근육의 상태가 잘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건 기합과 의지로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실제로 경험하니 아주 죽을 것만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 체육 수업
다른 한국인 유학생이 권유해준 덕에, 이번 학기에 체육 수업을 수강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지도 어느덧 5년, 체육을 수업으로써 마주할 일은 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매 차시를 즐겁게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경기 중에는 상대팀으로 만나게 되면 대개는 저를 경계하고 견제하셨던걸로 기억합니다. 플라잉디스크 얼티밋 경기 중에는 제가 디스크를 들고 있을 때 두세분은 저를 막아서는 모습이 내심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수업을 받았던 분은 느끼셨을것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게 경계할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신난 마티즈 마냥 두 번 다시 받지 못할 체육 수업을 온 몸으로 만끽한 것 뿐, 실수도 잦았고 팀원과도 잘 연계가 되질 않았습니다.
실제로 제 승률은 아마 1할도 채 되지 않습니다. 함께한 팀원들은 항상 자신들이 제대로 패스를 받아내지 못했다, 자신이 실수했다 라는 식으로 본인 잘못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팀이든 제가 들어가기만하면 패배가 쌓이니 원인은 자명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가를 떠나는 전철 안에서 되돌아 생각해보니, 이름 한 번 제대로 듣지 못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파쿠상(PARKパク 씨さん)이라고 부르던 그 목소리에 이제는 더 이상 이름을 붙일 수 없게 된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제와서 너무 늦게서야 아쉬워하는게 뭐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요.
# TLL
목요일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던 TLL은, 갈 수 있는 여력이 되면 매번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마감 직전의 과제가 있다거나, 한국에서 놀러온 친구들을 데리고 가이드를 해주거나 하는 이유로 두어번은 빠진 것 같지만, 대개는 꼭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생각만큼 친해질 수 없었다”, “매일 보는 사람들만 보게 된다”… 뭐 몇몇 이유로 발길이 끊긴 경우도 있는 모양이었지만은, 그렇다고 또 안 갈 이유는 무엇이며, 그 시간에 대신해서 할만한 것도 사실 없었습니다.
체육 수업 다음으로 많은 현지 친구들을 만나게 된 자리였다고 생각하는데, 대화를 받는 역할만 했어서 조금 낯부끄러운 자리였기도 합니다.
이게 실은, 한국어로도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데, 이걸 한창 배우는 중인 일본어, 작문과 발화에 있어서는 능숙하지 않은 영어를 써야 하기도 하니, 도저히 제대로 질문이라던가 화두를 던져낼 수가 없었습니다.
들어오는 질문을 받아내기도 바쁜 제 모습을 보면서, 아 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인가..! 나는 정말 저 친구들에게 일말의 궁금증, 질문 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건가..! 하면서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질문이라도 제대로 받아내면 또 모를까. 이번에 첫 한국여행이라고 여행지 추천해달라는 이야기에 여의도 더 현대, 국회의사당, 별마당 도서관, 경복궁 정도만을 겨우 겨우 입에 올려냈을때도 꽤 부끄러웠습니다. 옆에서 한국 여행을 수어번은 다녀온 현지인 친구가 어딘가 미묘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해치우기 위해 “서울은 뭔가 일이나 행사 목적으로밖에 안 가봤다”며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사가대학에 찾아온 영어 트랙 학생들과는 대화를 하다가, 결국에는 듀오링고를 시작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해외 생활을 준비하면서가 아니라 해외 생활을 하면서 듀오링고를 시작하다니. 심지어는 일본에서 듀오링고 영어 코스를 시작하다니.
저 역시도 참 이상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 SPACE-SAGA
특별청강학생(일반) 트랙의 학생이었지만 특별청강학생보다는 SPACE-SAGA 트랙의 친구들과 더 가깝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특별청강학생은 원래의 대학생활처럼 아무 강의든 선택해서 들어가고, 모두 저마다의 일정을 가지니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SPACE-SAGA는 모두의 대략적인 일정이 거의 통일되어있어서인지, 한 번 마주치게 되면 모두와 마주치게 되기도 하고, 모두가 몰려다니는 일정에 슬쩍 참여하기도 몇 번을 반복했습니다.
아무래도 영어 트랙이다보니 SPACE-SAGA 집단 자체가 굉장히 다양한 국가 출신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갖가지 생각지도 못한 장면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재밌었다고 생각합니다.
SPACE-SAGA의 친구들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나 주말의 한밤중에는 거의 항상 학교 앞의 로손 편의점에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다 마주치게 되어 그대로 오도가도 못하고 날이 넘어가고도 한참을 함께 있었던 적이 몇 번이었는지.
# 컬쳐 나이트
글로벌 서포터즈의 문화교류 축제 <컬쳐 나이트>를 준비하면서는, 어른스럽지 못한 면을 많이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잘 마무리해서 그리고 좋은 무대였다고 평가를 받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기획을 망치고, 뒷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무대의 그 조악함에 코웃음을 치고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비관에 몇 번을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실 행사를 준비하는 것이 또 하나의 작은 도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꽤 배운 것들에 대해서는 여유될 때 따로 자세히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일본은 부활동의 나라, 문화제의 나라였습니다. ——— ‘이 행사를 이끄는 학생들은 이미 몇 번이고 문화제를 준비했을 것이고 다년간의 부활동으로 다져진 운영 능력이 있었을텐데, 이런 행사쯤은 쉽게 해낼 수 있을텐데.’ ——— 라고 상상했던 것과 실제로 마주한 것이 다르니 더 큰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하기로는, 저와 일본 학생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나이 차이, 경험 차이가 제가 느꼈던 아쉬움의 원인이 되지 않았으려나 싶기도 합니다. 혹은 처음으로 행사라는 것을 운영해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에 개인적인 감정을 곧이곧대로 표출하는 것은 좋은 태도는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내색하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잘 되지는 못했는지, 결국에는 저희 팀을 담당한 스태프 학생에게 가볍게 사과를 받기도 했습니다.
다 지난 일이 되었기에 비로소 여유가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는 없었을까, 조금 더 여유로운 어른의 대처를 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지금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 결국은 또 다시 방에 틀어박혀
많은 노력, 돈, 시간을 지불해서 얻은 시한부의 해외 생활을 즐기지는 못할 망정, 저는 또 다시 방에 틀어박혀 키보드를 두들겼습니다.
어쩌면 컴퓨터를 전공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의 거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받아온 개발 프로젝트, 아마 원래 제게 부여될 권리와 책임을 한참 벗어난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억지로나마 계속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대략 4인 내외의 플레이어, 거기에 더해 4인 내외의 관전자를 수용하는 실시간 멀티플레이어 3D 게임을 유니티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였습니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어디를 가든, 항상 노트북을 챙겨 다니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작업을 두드렸습니다
주변에서도 교환학생에서만큼은 좀 쉬고 주변을 돌아보며 여유를 찾아보라고들 했는데.
특히 대개의 시간을 다 끌어다 먹고있는 저 프로젝트, 저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저보다도 주변이 더 난리였던 것 같습니다.
이윽고 그만두라는 아우성이 제 안팎에서 들려와, 어느 목소리가 친구의 조언이고 어느 목소리가 마음의 소리인지 알지 못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는 개발 프로젝트에서, 개발자는 저 혼자, 나머지 인원은 모두 아예 컴퓨터와 관련이 없는 학과. 그들은 AI가 원하는 무엇이든 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으로 무장하여 저를 질려버리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직까지도 프로젝트를 드랍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으리라. 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결국에는 결국에는 자기 손으로 구제할 길 없는 컴퓨터 너드임을 몸소 다시 한번 증명해보이지 않았습니까?
한국에서 이 프로젝트를 받아오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라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요. 저는 또 막간의 아마 몇 시간 정도 남짓의 짧디 짧은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또 다른 어떤 감당 못할 일을 벌이고 키보드를 눌러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할 수 있는 건 이렇게나 이상해진 저 자신을 저주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공과대학은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사가현 사가시 사가대학
# 인연
사가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한국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을 꼽으라면 단연, “일본인 여자친구를 만들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대략 50회까지는 세 보았는데, 이윽고 세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냥 일본 생활하는 한국인이 되어서 SNS에서 그러한 것만 보여주는 것인지, 실제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국제연애에 대해서 최근에 바이럴되는 정도가 늘어나거나 외국인과의 연애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게 있어서는 연애 교육이 될 만큼 꽤 다양한 사례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정도까지 노력하는 사람도 있구나. 아 결국에는 이러한, 혹은 저러한 결과가 되는구나.
교환학생은 짧은 기간 잠시 머물다가 원래의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환학생의 다음을 고민하는 각자의 모습들, 각자의 생각들, 행동과 대응들이 사람마다 색다르고 다채로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동네 어린아이들이 색칠한 산타 할아버지; 츠루하 드러그, 사가현 사가시 혼조
# 종지부는, 아직
한동안 일본 기업의 취업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기술 면접을 모두 통과하고서, 항상 일본어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지적받고 막혔기 때문에, 결국에는 ‘일본어를 더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라는 결과만이 남았습니다.
사실 멀리 가지 않아도, 당장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본어 수업도 완벽히 소화해내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발표를 마치고 날아들어오는 질문을 막아낼 때면, 매번 단어를 마땅히 떠올려내지 못해 말을 더듬게 되는 것이 얼굴을 뜨겁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이따금 “너는 왜 그렇게 말을 어렵게 하냐”는 불만을 들었을 때, 말도 안된다, 대체 어디에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는 걸까? 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네.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쓰는 어휘를 그대로 일본어로 말하려고 보니 거의 전부가 한자어였습니다.
이 단어는 일본어에서는 이런 발음이었나?를 몇 번을 거듭해 고민하다보면, 말을 더듬는 수준이 도를 넘어 어떻게 해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번 교환학생의 막바지에, 저는 모교에 일본어를 복수전공으로 신청하여 수리되었습니다. 지금 계산으로는 졸업이 1년 정도 늦춰질 것으로 보입니다.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나서야 신청하기보다는, 교환학생을 준비하면서 복수전공을 하는 편이 사실 이치에 더 맞을 것 같은데, 일본에서 듀오링고 영어 코스를 시작하는 것 만큼이나 미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적의 기회를 버리고 이제와서 뒤늦게 놓쳐버린 전철을 쫓는 기분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